2017년 05월 03일 (수) 묵상이 있는 클래식 | 작성일 2017.05.03 조회 수:515 |
*곡 제목 : Beethoven: Symphony no. 3 Eroica "영웅" *내용 1. Allegro con brio
17년 뒤에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죽었을 때 "나는 17년 전부터 오늘을 예상해 왔다."고 하며 제2악장 "장송 행진곡(Marcia Funebre)"을 가리켰다고 한다. 어쨌든 당시 청중은 괴물 같은 교향곡과 마주쳤다. "이전에 작곡된 어떤 교향곡보다도 길고 작법이 복잡했다. 미묘하게 얽힌 화성, 거인 같은 힘, 흉포한 불협화음, 사람의 마음을 마비시키는 듯한 긴장감 넘치는 장송 행진곡을 지닌 교향곡"이었기 때문이다. 교향곡 제1번과 제2번에는 아직 선배 작곡가 하이든과 모짜르트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으나 제3번부터는 놀라운 큰 비약을 이루고 있다.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고 도처에 독창적인 수법이 번뜩이면서 베토벤의 개성이 앞으로 불쑥 튀어나온다. 가령 제1악장의 크기는 18세기 중기의 고전 교향곡 한 곡 전부가 그대로 쏙 들어가 버릴 정도의 규모이며 또 제2악장에는 전혀 상식 밖의 장송 행진곡을 담았는가 하면 마지막 악장은 크고 웅장한 변주곡으로 채운 점 등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또 전체의 구성도 강철처럼 단단하고 악기 편성 역시 확대되었다. 호른을 세개나 쓰고 있는 점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여러가지 면에서 이 교향곡은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 일어났다. 코르시카 섬 태생의 일개 포병 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은 1795년 10월에 의회군을 지휘, 이 대혁명에 참가하여 반란군을 평정함으로써 일약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르고, 마침내는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이 되어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신출귀몰의 위력을 떨친 나폴레옹이야말로 베토벤의 눈에는 자유정신과 인간 해방의 기수로서 새 시대를 고하는 세기적 영웅으로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1798년 2월부터 4월까지 빈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베르나도트 장군이 베토벤과 개인적 친분을 가지게 되면서 그는 베토벤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게 되고, 베토벤은 그를 통해 영웅 나폴레옹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혁명의 풍운아, 영웅에게 바치는 교향곡이 탄생된 것이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리스(Ferdinand Ries,1784-1838)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그 녀석도 결국 속물이었군. 그 녀석도 역시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민중의 권리를 짓밟고 그 누구보다도 더 지독한 폭군이 되겠지!』하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2년이 지나서 출판된 파트 악보에는 「신포니아 에로이카」라고 이탈리아어로 쓰여져 있었으며 역시 이탈리아어로 된, 「한 사람의 영웅에 대한 추억을 기리기 위해서」란 부제가 붙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곡을 나폴레옹 일대기의 표제악으로 생각하고 들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교향곡 「제2번」까지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던 소위 희유성은 이 「제3번」에서는 그 자취를 감추고, 한층 더 진실한 도덕성이나 윤리성 같은 그 어떤 상한 힘을 이 「제3번」은 지니고 있다. 베토벤 자신도 「제9번」이 완성되기까지는 이 곡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다. 「제3번」은 확실히 장대한 곡이다. 시간적으로도 종래의 상식을 벗어나 50분이나 소요되는 긴 곡이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는 작곡자 자신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으며 1806년에 출판된 악보 중의 제 1 바이올린 파트에는, 『이 교향곡은 일반 다른 곡들보다 길므로 연주회에서 후반부 보다는 가능한 전반부에서 연주하는 것이 좋겠다. 즉 서곡 1곡에다 아리아 1곡, 또는 협주곡 1곡 다음에 연주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청중들은 앞 부분에서 이미 지쳐버리게 되므로 이 곡의 효과는 그만큼 상실하게 된다』라고 기술했을 정도다. 심지어 전술한 클레멘트 주최의 초연에서는 제2부의 첫 곡목으로 되어 있었다. 작곡 : 1803~4년
그리고 그는 당시 빈에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 대사와 대사관의 비서이자 바이 올리니스트였던 루돌프 크로이쩌로부터 프랑스에 자유와 질서를 가져온 나폴레옹의 업적에 대해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플라톤의 '공화국'을 숙독한 바 있었던 베토벤은 이 시대의 영웅의 자태를 보여준 나폴레옹을 자신의 작품으로 찬미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33세 때인 1803년 여름 이 교향곡의 작곡에 착수하여 1804년 봄에 완성시켰다. 스코어의 표지에는 '보나파르트'라고 썼으며 밑에 자신의 이름 '루비트비히 반 베토벤'이라 적어 이를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 내려고 할 무렵,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이 빈에 퍼졌다. 이 소식에 분개한 베토벤은 그 사본의 표지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