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11 뿌리 깊은 나무 | 작성일 2018.10.11 조회 수:5332 |
극동방송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강남비전교회 한재욱 목사입니다. 인문학의 주인은 하나님! ‘인문학을 하나님께’ 오늘은 이정명의 소설 「뿌리 깊은 나무」를 하나님께 드리며 ‘고난 속에서도 꽃이 핍니다’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소설 「뿌리 깊은 나무」는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전 7일간 집현전 학사들을 상대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살인 사건의 이면에는 조선 최고의 천재 집단이 목숨을 걸고 추진하던 비밀 프로젝트가 있었고, 그것을 막으려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 비밀 프로젝트가 바로 ‘훈민정음’이었습니다. 세종의 시대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필요로 하는, 대전환기였습니다. 세종은 새 시대에 맞는 최고의 프로젝트를 구상했는데, 그것이 바로 훈민정음의 창제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시대적 상황 때문에 철저하게 비밀로 해야 했습니다. 세종 당시에도 국가의 존립과 생존 때문에 명나라를 사대(事大)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고유의 역법을 만들어 놓고도 조선력(朝鮮曆)이라 부르지 못하고, 조선의 향악을 바로 잡은 후에도, 아악이라는 이름을 버릴 수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중화 문자인 한자(漢字)를 놔두고 조선의 고유문자를 창제한다는 것은,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날 만한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최만리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극한 반대는 왕권의 존립마저 흔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이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합니다. 좋은 책은 100번이나 읽고, 세계 최고의 문자인 한글을 창제하고, 4군 6진을 개척하고, 과학과 음악을 발전시키고, 집현전을 설치하여 조선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성왕 중의 성왕 세종대왕. 왕으로서의 업적 못지않게 인품이 지극하여 ‘성품과 업적’ 모두를 겸비한 최고의 군왕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치적에 가려서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심히 병약한 존재였습니다!
또한 안질을 앓았고, 두통과 이질, 부종, 풍증, 수전증 등 잔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이에 세종은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니, 나의 쇠로함이 심하도다” 40대 초에는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도 몰라 볼 정도로 시력이 떨어졌습니다. 거의 시각 장애인에 가까웠습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 23년(1440년) 세종이 눈이 보이지 않아서 정사를 돌볼 수 없다며, 세자에게 전위하겠다고 발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신하들이 울면서 만류했습니다. 세종은 그 후에도 서너 차례 보위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세종은 가장 고통스럽고 열악한 건강 속에서 백성을 돌보며 조선의 꽃을 피웠던 것입니다. 유리를 바닥에 떨어 뜨리면 산산 조각이 나고, 진흙을 떨어 뜨리면 달라 붙고, 공을 떨어 뜨리면 튀어 오릅니다. 똑같은 시련을 겪어도 한 사람은 폐인이 되고, 한 사람은 시인이 됩니다.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의 은혜와 만나면 꽃이 핍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사40: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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